호국과 효심의 절터, 감은사터

[문화유적]

- 감은사터

주는 신라를 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곳이니만큼 신라와 관련된 유적과 이야기들로 넘치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런 신라의 흔적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경주를 찾아 나서는 일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천 년을 훨씬 뛰어넘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과도 같습니다.

경주를 답사할 때 감은사터는 약방의 감초와도 같이 된 곳입니다.

이렇게 된 데는 유홍준이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란 베스트셀러의 덕분이 크지만, 꼭 그 책이 아니더라도 감은사터는 경주 답사에서 놓치기엔 너무나 아까운 곳입니다. 감은사터가 있는 이곳은 예로부터 동해구(東海口)로 불리던 곳으로, 대왕암과 이견대와 함께 신라 호국이념이 깃들여 있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 감은사터 삼층석탑

감은사는 한마디로 문무왕을 위한 절이었습니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문무왕은 재위 21년(681년)에 죽었습니다. 그는 생전에 자주 "나는 세간의 영화가 싫은지 오래다. 죽은 후에는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동해구에 절을 세워 부처님의 힘으로 왜구로부터 신라를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절의 완공을 보지 못 하고 죽었으며, 그의 아들인 신문왕이 부왕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체를 화장하여 동해에 안장 또는 산골하고, 감은사를 완공하였습니다.


- 감은사 금당터

이곳에서 실시된 발굴조사로 감은사 옛 가람 배치의 전모가 드러났는데, 이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끈 게 바로 금당 밑의 구조였습니다.

왜냐하면 <삼국유사>에 금당(金堂) 뜰 아래에 동쪽을 향해서 구멍을 하나 뚫어 두어 동해의 용이 이 절에 와서 돌아다니게 해놓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야기의 근거가 무엇인지 다들 궁금해 하였습니다. 발굴 결과 금당의 중앙에는 공간이 있었으며, 물이 드나들 수 있는 수조(水槽)장치가 드러나 놀라게 하였습니다.

감은사터의 동쪽에 대왕암이 있고, 앞으로는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바다로 흘러드는 대종천이 있습니다. 당시 대종천의 물길이 감은사 바로 밑으로 흘렀다면, 동해용은 대종천을 거슬러 올라와 감은사 금당 밑의 구멍을 통해 오갔음직도 합니다. 지금도 절 앞쪽에는 용담이라는 못이 남아 있습니다. 이 못과 절이 연결되어 용이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되었다고 본다면, 대종천과 이 못이 연결되었으리라는 추측도 얼마든지 가능해 보입니다.

설사 이런 이야기가 허황된 이야기라 하더라도 왕의 능침이 있는 바다와 절터를 이런 식으로 연결하고, 그 연결의 의미를 호국의 의미로까지 끌어올리려는 신라인의 배려가 놀랍습니다. 이런 연유로 절 뒷산을 용당산(
龍堂山)이라 하고, 이곳의 마을 이름도 용당리라 부릅니다.


- 감은사터 삼층석탑

감은사터 삼층석탑은 현재 남아 있는 신라시대의 탑으로는 가장 큰 것입니다.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두 탑은 크기로 보나 주의를 압도하는 위엄에 있어서나 신라를 대표하는 멋진 탑이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달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감은사터는 그다지 넓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금당터 역시 별로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감은사터 삼층석탑은 신라시대 탑 가운데 가장 큰 탑입니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쌍탑으로 말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웅장한 탑을 그것도 쌍탑으로 세운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제 삼국통일을 이뤄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맞이한 신라인들의 호국 의지의 열망을 이처럼 표현한 것은 아닐까요?



- 감포 대왕암

감은사터 동쪽 대본해수욕장 앞 동해에 떠 있는 대왕암은 신라 30대 문무왕의 해중릉(海中陵)이나 유골을 뿌린 산골처로 알려진 곳입니다.

대왕암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67년 신라오악조사단이 토함산과 동해구 유적조사를 하던 도중 바닷속에서 능침(陵寢)을 발견하였다고 발표하면서부터입니다. 그리고 당시 조사단은 토함산 석굴암에 있는 석불의 시선이 이곳 대왕암이 있는 동해구 유적지대에 닿아 있음을 발견하고는 석굴암을 조성한 김대성이 그의 선조들의 묘역을 위해 석굴암을 지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대왕암은 겉으로 보기에는 돌섬으로 보이나, 돌섬 중앙을 깊숙이 파내어 동서남북 사방으로 수로를 뚫었으며, 바닷물은 동쪽 수로로 들어와 서쪽 수로로 빠져나가도록 높낮이를 잡고 있어 그 안에 가득 찬 바닷물은 파도도 없이 그지없이 맑다고 합니다. 1967년 신라오악조사단의 주장에 따르면 문무왕의 뼈를 사리함에 넣고 이곳 물 밑에 안치했다고 합니다.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며, 용으로 변해서 나라를 돕겠다는 문무왕의 유지를 그대로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글 일부는 이하석의 <삼국유사의 현장기행>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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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9 11:36 2010/02/09 1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