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관가정 사랑채
관가정(觀稼亭)은 양동마을의 왼편 전망이 높은 서향받이 언덕 위에 있습니다. 집 이름은 '농사짓는 풍경을 보는 정자'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양동마을의 집 이름은 관념적인 이름이 많은 다른 지역의 양반집들과는 달리 다분히 전원적인 냄새가 강합니다. 예를 들면 큰 향나무가 있으면 '향단(香檀)', 소나무가 있으면 '송첨(松簷)' 등으로 말입니다.
관가정 사랑채에 오르면 이름에 걸맞은 경관이 펼쳐집니다. 안채에서는 중문을 통해 앞산만이 보이지만, 사랑채에선 앞산뿐만 아니라 그 아래로 펼쳐진 너른 들판까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앞산뿐 아니라 농사짓는 들판의 모습까지도 경관의 한 요소로 삼은 셈입니다.

- 관가정 배치도
건물의 기본구조는 사랑채와 안채·행랑채가 'ᄆ'자형 좌우측에 날개를 단 모습으로 되어 있고, 그 뒤편 동북쪽에 별도로 일곽을 이룬 사당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관가정은 조선 성종 때의 문신인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 1463~1529)의 고택이자 손씨 문중 종택으로 1514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손중돈은 차남이었지만 맏형이 장가들어 마을을 떠난 바람에 손씨가문의 장손이 되었기 때문에 분가 직후 관가정이 대종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4세기가 훨씬 지난 후인 20세기 초에 원래의 서백당으로 대종가를 옮겨가게 됐었고, 그때부터 관가정은 손씨일가의 별장으로 쓰였다가 현재는 빈 채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 관가정의 향나무
현재의 양동마을은 1458년 청송에 살던 손소(孫昭, 1433~1484, 월성 손씨)라는 25세의 청년이 처가가 있는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마을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장인인 류복하(柳復河, 풍덕 류씨)는 여말선초의 만호(萬戶)로 일대의 수많은 노비와 토지를 소유한 토호였습니다. 더 이전 고려시대에는 장(蔣)씨들이 살았고, 그 이전에는 오(吳)씨들의 세거지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10여 호 미만의 작은 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씨들이 계속 바뀐 원인은 당시의 상속제도 때문이었습니다. 처가의 재산을 시집간 딸에게도 균등하게 나누어주는 이른바 '남녀균분상속제'가 일반적인 관행이었고, 결혼한다는 것은 남자가 처가 동네로 이주하여 '장가를 드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처가에 손이 끊기면 모든 재산은 사위에게 상속되어 처가동네에 터를 잡고 세거하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습니다. 손소의 장인 류복하 역시 장씨 집안에 장가들어 자리를 잡았고, 무남독녀만을 두었던 관계로 모든 재산을 사위 손소에게 넘겨주었습니다. 현재 풍덕 류씨의 자손들은 이 마을에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이런 연유로 월성 손씨 집안에서 제사를 지내는 '외손봉사(外孫奉祀)'의 풍습이 남아 있습니다.

- 관가정의 사당
월성 손씨의 양동마을 입향조인 손소는 평범한 지방의 재산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관직에 나갔고, 세조 때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2등 공신'이 되어 국가로부터 노비 10구와 논밭 100결을 하사 받았습니다. 또한, 공조참의, 안동부사, 진주목사 등의 굵직한 벼슬도 역임했습니다. 따라서 손씨 가문은 그 명성에 힘입어 계속 양동마을에 뿌리박고 세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손소는 5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처가의 대를 이으려고 장가를 가버려 둘째아들이 양동마을의 실질적인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 1464~1529)입니다. 우재는 김종직의 제자로 영남 성리학계의 태두로 추앙 받으며, 3조의 판서 등 최고위직 벼슬도 두루 역임한 인물입니다. 이로써 손씨일가는 부자 2대에 걸친 명문가를 형성하게 됐습니다. 손씨 부자는 중앙에서 관직을 하면서도 향촌의 기반을 확고히 관리해 명실상부한 씨족마을로 정착시켰습니다.
손소에게는 외동딸이 있었는데, 이 외동딸에게 이번(李番, 여주 이씨)이 장가들어 처가살이를 시작했습니다. 이번은 두 아들을 둔 후 일찍 사망하였고, 그 아들들은 외가인 양동마을에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맏아들이 바로 유명한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입니다. 그는 이조판서와 정승급인 좌찬성을 역임하고 퇴계학의 선구로 추앙받으며 '동방4현'의 지위에 오른 대사상가입니다. 이로써 양동마을은 조금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됐었습니다.
대대로 외손들이 주인을 차지했던 전통은 손소-손중돈 대에 와서 단절되는 듯하다가, 이언적이라는 걸출한 외손이 배출됨으로써 다시 외손 정착의 전통이 부활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손소의 후예인 월성 손씨 가문과 이언적의 후예인 여강 이씨 가문이 한 마을에 동거하는 희귀한 양성씨족(兩姓氏族) 마을이 되었습니다. 두 가문 모두 나름대로 긍지와 만만치 않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어 오랜 기간을 동거하면서 갈등과 대립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가문 간의 경쟁의식이 우리나라 전통마을 가운데 가장 뛰어난 건축물들을 갖게 된 결과도 낳았습니다.

- 관가정 측면 모습으로, 오른쪽으로 사랑채가 보입니다.
관가정의 사랑채는 집의 정면 가운데 나 있는 중문 왼쪽에 있는데, 누마루로 꾸민 2칸 사랑대청과 2칸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대청 정면은 남향으로 항시 바깥 경치를 조망할 수 있게 개방하였고, 서향인 좌측면에는 4분합 들문을 달아 여름에는 서향 볕을 막고 때로는 집 밖 경관을 감상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대청 우측 모서리에는 안채로 드나들 수 있는 은밀한 작은 문을 내었습니다. 대청과 방 사이에는 3분합 들문을 두어 무더운 여름날을 시원하게 보내고 필요할 때마다 공간을 넓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 관가정 안채 대청에서 본 모습
관가정에서 특이한 것은 총면적의 절반을 차지한 대청마루입니다.
이 정도 명문가의 대종가는 일 년에 수십 차례의 크고 작은 제사를 치러야 했고, 제사의례는 종갓집의 가장 큰 일상사였습니다. 따라서 집을 지을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은 제사에 필요한 공간 확보와 배열이었으며, 집에 비해 지나치게 큰 6칸 안대청도 수십 명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된 공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안채에는 중문 맞은편에 안채 마당 폭을 가득 메운 3칸 안채 대청과 그 좌우에 각기 건넌방과 안방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건넌방과 안방 앞쪽으로도 여러 공간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 부엌이 안방과 다소 떨어져 자리를 잡고 있는 게 조금 이채롭습니다.

- 관가정 안채 마당에서 바라다본 중문간
'ㅁ'자형의 폐쇄적인 가옥구조에서 흔히 보듯 관가정 안채 마당 역시 좁고 답답해 보입니다. 이것은 폐쇄적인 가옥 구조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안채 마당에 들어서면 사방이 막혀 있어 중문이 바깥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좁고 답답한 안채 마당을 보면서 이 공간 속에서 한평생을 살아가야 했을 당시 여인네들의 아픔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 관가정 안채
안채 대청 왼쪽으로 보이는 방이 건넌방이고, 그 맞은편에 안방이 있습니다. 대청이 방들에 비하여 큰 게 눈길을 끄는 데, 이 대청에서 얼마나 많은 대소사가 이루어졌을지 짐작되기도 합니다.

- 관가정 안채 기둥
관가정에는 그냥 보면 평범해 보이는 안채 기둥에도 범상치 않은 멋을 부렸습니다. 네모로 깎은 기둥 옆면에는 세로로 길게 띠를 새겼으며, 기둥 맨 위쪽에도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을 따로 하였습니다.

- 관가정 안채 대청 뒷벽
안채 대청 뒷벽에는 쪽문을 달아놓았습니다. 더위가 찾아오면 이 쪽문을 열어놓아 시원한 바깥바람이 통하게 하여 더위를 식혔을 뿐만 아니라, 비록 뒤뜰이지만 바깥 모습 또한 볼 수 있어 덜 답답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다 날씨가 추워지면 이 쪽문을 닫아 그 추위를 막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폐쇄적인 가옥구조에서 대청 뒷벽의 쪽문은 외부로 향한 열린 공간일 뿐만 아니라 부엌으로부터 나오는 연기 등을 배출하는 환기구 역할도 하였습니다. 추위가 닥쳐 어쩔 수 없이 이 쪽문을 닫아도 이 벽면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지 않도록 위쪽에 공기가 통할 수 있도록 틈을 둔 것을 보아도 이런 환기 역할이 언제나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 글의 일부는 블로그 <예술로>에서 관가정에 대한 글을 참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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